일하는 방식

할 줄 알아서 AI를 시키는가, 몰라서 AI에 매달리는가

Ko_Peter 2026. 4. 1. 08:00

이미지 출처: 전지적참견시점 박은영 셰프 편(유튜브)

 

“이런 건 AI로 하면 금방 되지 않아? 굳이 우리가 여기다 리소스를 쏟을 필요가 있을까?”

요즘 회의실에서 리더들이 가장 자주 던지는 질문은 아마 이것일 겁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보고서 초안부터 이미지 생성, 데이터 분석까지 AI는 인간보다 수십 배, 수백 배 빠릅니다.

경영진 입장에서는 환호할 일이죠. 비용은 줄이고 속도는 높일 수 있는 이 마법 같은 도구를 마다할 이유가 없으니까요.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아주 위험한 착각에 빠지곤 합니다. 효율성이라는 달콤한 말에 가려져 ‘도구의 주인’이 아닌 ‘도구의 노예’가 되어가는 위기를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안 하는 것’과 ‘못 하는 것’의 결정적 차이

저는 '할 줄 알아서 AI에게 시키는 것과 어떻게 하는지 몰라서 AI에게 매달리는 것'은 아예 다른 차원의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빤히 아는 사람은 AI를 그냥 ‘손 빠른 비서 혹은 에이스 팀원’처럼 부립니다. 브랜드의 느낌이 살짝만 어긋나도 "이건 우리 결이 아니야”라고 바로 잡아내죠. 내가 주인이 되어 필요한 부분만 쏙쏙 골라 쓰는 ‘주도적인 자동화’입니다. 여기에는 리스크가 거의 없습니다. 오히려 전문가의 직관에 AI의 속도가 더해져 엄청난 시너지가 나죠.

반면, 일의 핵심을 모른 채 AI에 의존하는 것은 ‘생각의 주도권을 통째로 넘겨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스스로 고민해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건너뛰면, 무엇이 좋은 결과물인지 판단할 기준 자체가 세워지지 않습니다.

AI가 내놓은 화려한 문장에 가려져 정작 이 일이 왜 필요한지, 어떤 맥락에서 나온 답인지 살필 기회를 놓치게 되는 거죠. 당장은 결과물이 빨리 나와서 다행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실상은 내 실력이 아니라 ‘운’에 조직의 일을 맡기고 있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성실한 마케터 B씨는 왜 ‘사고’를 쳤을까?

여기 아주 성실하고 생산성 높은 마케터 B씨가 있습니다. 그는 신규 서비스 런칭을 앞두고 회의록 전체를 AI에 넣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명령했죠.

“이 회의 내용을 바탕으로 우리 서비스의 강점을 극대화한 상세 페이지 기획안과 디자인 시안을 뽑아줘.”

얼마 뒤 AI는 아주 근사한 시안을 내놓았습니다. 문장은 매끄러웠고, 디자인은 트렌디했습니다. B씨는 오타가 없는지, 문구가 어색하진 않은지 꼼꼼히 검토했습니다. 그는 결코 일을 대충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사고는 예기치 못한 곳에서 터졌습니다. AI가 회의록에 나온 단어들을 조합하는 과정에서 나중에 도입하기로 한 ‘생체 인식 보안 결제 시스템 탑재’라는 문구와 그럴듯한 아이콘을 시안에 넣어버린 것입니다.

B씨는 그 문구를 보고도 크게 의심을 하지 않았습니다. 평소에 우리 제품이 실제로 어떻게 돌아가는지나 앞으로 어떤 기능을 준비하고 있는지를 깊이 파고들기보다 AI가 만들어주는 결과물을 검토하는 데만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일의 맥락을 모르니 AI가 지어낸 거짓말(환각 현상)을 ‘훌륭한 아이디어’로 착각한 것입니다. 이 시안은 리더의 승인을 거쳐 광고로 나갔고, 허위 광고에 대한 고객들의 항의가 빗발치며 브랜드 신뢰도는 바닥으로 추락했습니다.

이 사례에서 가장 무서운 지점은 B씨의 실수가 아닙니다. 본인이 무엇을 잘못했는지조차 모르는 상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내가 배경 지식이 없으면 AI의 답변은 언제나 완벽해 보입니다. 당장은 일이 잘되는 것처럼 보일지 모릅니다. 결과물은 빨리 나오고, 회사는 만족하겠죠. 하지만 어느샌가 맥락을 잃어버린 조직은 위기 상황에서 스스로 핸들을 꺾을 능력을 잃게 됩니다. AI가 가리키는 방향이 벼랑 끝이라 해도 그게 정답인 줄 알고 풀액셀을 밟게 되는 것입니다.


원칙을 알거든 버려라

고전적인 격언 중에 '원칙을 알거든 버려라'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기서 많은 리더가 관심가지는 지점은 뒷부분인 ‘버려라’입니다. 하지만 이 문장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앞에 붙은 전제 조건, 바로 ‘원칙을 알거든’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원칙은 거창한 이론이 아닙니다. 우리 제품이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는지, 그리고 우리 고객이 우리에게 진짜로 기대하는 게 무엇인지를 명확히 아는 것입니다. 이 과정을 거친 사람만이 비로소 그 원칙을 ‘버리고’ AI라는 도구를 자유자재로 휘두를 자격이 생깁니다.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맥락도 모른 채 무작정 AI에만 매달리는 건 자기 실력이 늘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발로 차는 거나 다름없습니다. 기초 체력도 없으면서 장비 빨만 세우는 선수가 금방 한계에 부딪히는 거랑 똑같죠. 원칙을 익히는 시간을 아깝다고 여기고 AI 쓰는 법만 파고들다가는 도구 없이는 자기 생각 하나 제대로 내놓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버릴지도 모릅니다.


이제 우리가 진짜 물어봐야 할 것들

일 잘하는 사람을 보는 눈도 달라져야 합니다. 얼마나 빨리, 예쁘게 뽑아냈는지는 사실 별로 안 중요합니다. 그런 건 AI가 세상에서 제일 잘하기 때문입니다. 대신 결과물을 가져온 팀원과 함께 맥락을 맞춰보기 위해 이런 질문들을 툭 던져보세요.

“AI가 준 것 중에 우리 상황이랑 안 맞어서 직접 수정한 것 있어요?”
“이 말투 우리 평소 분위기랑 좀 다른데? 어디를 고쳤어요?”

이제는 결과물을 잘 뽑아내는 능력이 아니라 AI가 내놓은 수많은 답변 중에서 ‘우리에게 맞는 걸 골라내고 틀린 걸 솎아내는 능력’을 확인해야 합니다.


도구의 주인이 될 것인가, 노예가 될 것인가

AI는 분명 축복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는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원리를 모른 채 AI가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것이라 믿는 조직은 도구에 휘둘릴 수밖에 없습니다.

진정한 혁신은 단순히 AI를 잘 다루는 기술이 아닙니다. AI가 내놓은 결과물을 보고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우리에게 진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아채는 ‘사람의 숙련도’에서 시작됩니다. 이제 효율이라는 늪에서 빠져나와 기본의 소중함을 다시 돌아봐야 할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