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 전략

"어렵게 쓰느라 고생하셨네요. 근데 고객은 안 읽습니다."

Ko_Peter 2025. 11. 27. 11:04

 

20년 전, 사회생활의 첫발을 기자로 내디뎠던 시절을 떠올려 봅니다. 당시 제가 쓴 기사는 온통 딱딱한 한자어와 평소에는 잘 쓰지 않는 문어체 표현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지면은 한정되어 있었고, 정해진 원고지 매수 안에 글을 꽉 채워 넣으려면 친절하게 풀어쓰기보다는 함축적인 단어를 고르는 편이 훨씬 효율적이었으니까요.

'자세히 밝히다'라는 말 대신 '규명(糾明)'을, '서로 돕다'라는 네 글자 대신 '공조(共助)'라는 두 글자를 쓰는 식이었죠. 긴 설명을 짧은 한자어로 치환하는 것, 그것은 좁은 지면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제가 익혀야 했던 일종의 생존 기술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와서 솔직히 고백하건대 제가 어려운 말을 고집했던 이유가 단지 '지면의 제약'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그 이면에는 제 무의식적인 방어기제도 작동하고 있었습니다.

어렵고 딱딱한 어휘를 구사해야 제가 더 전문적으로 보이고, 독자들이 제 글을 '권위 있는 정보'로 신뢰할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이 있었던 겁니다. 쉬운 우리말을 쓰면 왠지 제 글의 무게감이 떨어져 보일까 봐 겁이 났던 것이죠.

그때는 미처 몰랐습니다. 제가 '효율'을 핑계로 글자 수를 줄이는 동안, 독자가 제 글에 머무를 수 있는 '관심의 시간'까지 함께 줄여버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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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텐츠 마케터로 일하면서 시장 조사를 위해 테크 기업의 홈페이지를 둘러보거나 새로운 자료를 찾다 보면 우리는 흔히 이런 문구들을 접합니다.

'혁신적인 메커니즘을 통한 프로세스 최적화 구현'
'차세대 솔루션 기반의 초개인화 고객 경험 제공'

회사 입장에서는 가슴 뛰는 문장일지 모릅니다. 우리 기술이 얼마나 정교한지, 우리가 얼마나 치열하게 고민했는지를 보여주는 단어들이니까요. 하지만 냉정하게 말해 고객은 우리의 고생에 관심이 없습니다. 고객의 관심사는 오로지 '그래서 이게 내 삶을 어떻게 바꿔주는데?'라는 질문 하나뿐입니다.

더 큰 문제는 고객이 우리 글을 읽는 환경입니다. 우리의 잠재 고객들은 조용한 서재에서 차를 마시며 우리 브랜드의 블로그나 상세 페이지를 정독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출근길 꽉 낀 만원 지하철 안에서, 상사의 눈치를 보며 잠시 딴짓을 하는 틈에, 혹은 퇴근 후 지쳐 소파에 기대앉은 찰나의 순간에 스마트폰을 켭니다.

즉, 이미 정보 과부하로 뇌가 지칠 대로 지친 상태입니다. 인지심리학에서는 이를 '인지적 구두쇠(Cognitive Miser)'라고 부릅니다. 인간은 생각하는 데 드는 에너지를 본능적으로 아끼려 한다는 것이죠.

이런 고객들에게 내용을 검색하거나 문맥을 곱씹어야 하는 문장은 정보가 아닙니다. '해독해야 할 암호'일 뿐입니다. 아무리 업계에서 통용되는 상식이라 우겨도 소용없습니다. 고객의 귀에는 그저 '불친절한 소음'으로 들릴 뿐입니다.

반응은 역시 즉각적입니다. 읽는 즉시 이해되지 않는 콘텐츠는 결국 '이탈'이라는 성적표를 받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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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어려운 글이 고객을 떠나게 한다는 건, 이제 많은 분이 알고 계십니다. 하지만, 최근 우리가 글을 어렵게 쓰게 만드는 복병이 하나 더 생겼습니다

바로 'AI'입니다.

요즘은 AI에게 키워드 몇 개만 던져주면 그럴듯한 초안을 순식간에 뽑아줍니다. 문법도 완벽하고 논리도 제법 그럴싸하죠. 그러다 보니 많은 분이 '어? 주제랑 맥락이 대충 맞네?' 싶으면 별다른 고민 없이 마침표를 찍고 발행 버튼을 누릅니다.

하지만 AI가 학습한 수많은 비즈니스 문서는 태생적으로 딱딱하고 어려운 '공급자의 언어'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편리함에 기대어 AI의 문장을 그대로 옮길 때 콘텐츠는 겉만 번지르르할 뿐 더 빠르고 방대하게 어려워지고 맙니다. '사람의 냄새'가 사라진 글이 양산되는 것이죠.

그렇기에 저는 AI 시대일수록 콘텐츠 전문가의 역할이 '통역사' 혹은 '번역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내부의 난해한 언어, 그리고 AI가 쏟아내는 기계적인 언어를 고객이 쉽게 알 수 있는 '일상 언어(Customer Language)'로 번역해 주는 사람 말입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파스칼은 지인에게 편지를 쓰며 이런 추신을 남겼다고 합니다.

"시간이 없어서 편지를 길게 썼습니다."

짧고 쉽게 쓰는 것이, 길고 어렵게 쓰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과 고민을 필요로 한다는 얘기입니다. 실제로 글을 써보면 알게 됩니다. 전문 용어를 나열하는 건 쉽지만, 그 개념을 이 분야를 전혀 모르는 사람도 이해할 수 있는 쉬운 비유로 바꿔 설명하는 건 엄청난 내공이 필요하다는 것을요.

무언가를 아주 쉽게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은, 그 본질을 완벽하게 꿰뚫고 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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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요즘 글을 쓰고 난 뒤, 가상의 독자를 설정해 봅니다. 오랜만에 만난 저와는 전혀 다른 분야에서 일하는 친구들을 떠올립니다. 그리고 스스로 질문합니다.

"이 글을 그들이 읽었을 때, 멈칫거리지 않고 끝까지 읽을 수 있을까?"

만약 어딘가에서 턱턱 걸린다면, 그건 고객이 무지해서가 아니라 제 글이 불친절한 탓입니다. 글쓰기의 목적은 내 지식을 뽐내는 게 아니라 상대방을 설득하고 행동하게 만드는 것이니까요.

화려한 미사여구로 고객을 잠시 감탄하게 만들 수는 있어도 그것이 곧 구매나 전환으로 이어지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투박하더라도 '이 기능을 쓰면 당신의 퇴근 시간이 1시간 빨라집니다'라고 말하는 단순하고 명료한 제안이 고객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20년이라는 시간 동안 '글 밥'을 먹으며 제가 얻은 결론은 하나입니다.

가장 높은 수준의 전문성은 가장 쉬운 언어로 표현된다는 것. 그리고 고객을 향한 최고의 배려는 그들이 고민할 필요 없도록 쉽게 써주는 '친절함'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의 브랜드는 고객과 대화를 하고 있나요, 아니면 혼잣말을 하고 있나요?